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패트릭 유잉 (문단 편집) ==== 뉴욕으로의 입성 ==== [[파일:external/www.nba.com/ewing1_627.jpg]] 1985 드래프트는 앞서 말한대로 "유잉 드래프트"라 불렸다. 당시 유잉의 스카우팅 리포트 장점란에 쓰여 있는 말은 단 한 문장. "Are you kidding?" 전년도에 하위권 성적을 거둔 팀들은 어떻게든 1순위를 잡아 유잉을 영입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 때문에 로터리 추첨 당일 모두의 시선은 데이비드 스턴의 손에 쏠렸다. 드래프트 당일보다도 로터리가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물론 1순위는 이견없이 유잉일테니, 누가 유잉을 뽑게 될 지에 관심이 쏠렸기 때문. 모든 팀이 사라지고 인디애나 페이서스와 뉴욕 닉스만이 남은 상태에서 2순위에 인디애나 페이서스가 당첨~~꽝~~되었음을 알리자 뉴욕 팬들은 그야말로 흥분으로 달아올랐고, 이후 열린 드래프트에서 유잉은 이견의 여지없이 1순위로 뉴욕에 입성하게 되었다.[* 당시 이 과정을 놓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원래는 최하위팀 둘이 동전 던지기로 1순위를 결정하던 방식이 많은 부작용이 있다하여 로터리가 처음 적용된 해였기 때문...인데 이에 대해 데이비드 스턴이 일부러 빅마켓인 뉴욕에 유잉을 주기 위해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고 말이 많았다. 심지어 로터리 추첨에서 닉스 것만 귀퉁이가 접혀져 있어서 스턴이 그걸 일부러 뽑지 않았다는 둥... 뭐 진실은 저 너머에.][* 참고로 패자 인디애나가 뽑은 선수는 오클라호마 대학교의 파워 포워드 웨이먼 티스데일인데, 이 선수는 인디애나, 새크라멘토, 피닉스의 주전 파워 포워드였고 15~20점 득점을 올리던 파워 포워드지만 2순위 답지 못하게 올스타에 뽑히지도 못한 평범한 커리어를 보내고, 은퇴 후엔 재즈 베이시스트로 활동하다가 2009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당시 이 해 드래프트에서 유잉은 최고의 선수임에 틀림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드래프트 최고의 행운아는 유잉의 닉스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타 재즈가 그리 높지도 않은 '''13순위'''로 무려 [[칼 말론]]을 뽑았기 때문에. ~~둘 다 우승은 못했으니 쌤쌤~~] 당시 뉴욕 닉스는 그렇게까지 나쁜 팀은 아니었다. 빌 카트라이트와 버나드 킹, 제랄드 윌킨스 등으로 이루어진 라인업은 닉스를 꽤 괜찮은 팀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주요 선수들의 잇따른 부상으로 인해 팀이 나락으로 떨어진 찰나에 유잉을 영입하게 된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유잉은 데뷔 직후 첫 시즌인 1985-86 시즌에서 루키임에도 불구하고 50경기에 출장하며 20득점, 9리바운드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고 팀을 이끌었다. 결정적으로 유잉은 당초 대학 시절 선보인 뛰어난 수비력 탓에 공격력이 상대적으로 폄하당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성적은 그의 재능이 [[빌 러셀]]보다도 대단할 것이라는 평가마저 듣게 만들었다. 물론 주전급 베테랑들이 대거 시즌 아웃된 상황에서 팀 성적은 여전히 나락인 상태였지만, 스스로도 무릎 부상으로 인해 30게임이나 결장하면서도 일궈낸 성적인 탓에 충분히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그 공로로 신인왕에 선정된다.[* 하지만 이 당시 입었던 무릎 부상은 안타깝게도 이후 유잉에게 거의 대부분의 운동능력을 빼앗아가버리고 말았다.][* 어이없게도 이런 좋은 성적을 거뒀음에도 당시 뉴욕 팬들은 유잉에게 버스트(bust, 유망주의 실력이 기대 이하로 드러났을때 부르는 말)라며 야유를 퍼부었는데, 당시 이들은 유잉이 바로 닉스를 우승권으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지만 팀성적이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24승->23승). 물론 진짜로 팀을 꼴찌권에서 우승권으로 이끄는 [[래리 버드]]같은 괴물도 있지만, 그건 진짜 역대급이고 유잉 정도의 성적이라면 bust라 불릴 건 절대 아니다. 그러나 뉴욕 팬들과 언론은 유잉의 선수생활 내내 과도한 기대를 걸었으며, 이에 못 미치면 주저없이 야유를 퍼부었다. 실제로 아래 언급되는 유잉의 말년 트래이드 요청에는 이런 사정도 한 몫했다. 질려버린 것. 유잉에 대한 뉴욕 팬들의 평가가 호평 일색으로 바뀐 건 아이러니하게 유잉이 떠난 이후였다. 떠난 다음에야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느끼게 된 것. 선수생활 내내 유잉은 팬들과 언론에게 엄청나게 시달려야 했다.][* 사실 젊은 팬들은 그가 은퇴한 후 레전드로 대접받는 데에만 익숙하겠지만 90년대 당시 유잉은 은근히 평가절하를 당하는 선수였다. 하필 동시대에 워낙 괴물 센터들이 많고, 라이벌 4인방 중 가장 처지는 축이란 것, 플레이가 다소 정적이라 임팩트가 좀 약하단 것 등 때문에 "그럴듯하게 포장됐을 뿐 속빈 강정 아니냐"는 의견도 많았고, 아래 서술되는 유잉 무용론 역시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다. 어이없는건 이런게 농알못의 헛소리로 간주되는게 아니라 "어? 그런가?" 정도의 소수의견 정도로 받아들여졌다는 것. 게다가 당시는 리그에 좋은 센터들이 우글거렸기 때문에 "엘리트 센터" 자체가 그렇게까지 희귀자원은 아니었다. 실제로 돈 넬슨은 유잉을 오닐로 대체하려고 했는데, 특A급 센터를 특A급 센터로 대체하는 사치가 가능했던 게 바로 90년대였던 것.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고 규모도 큰데 냄비근성이 적잖이 있는 뉴욕 미디어가 계속 우승에 실패하는 유잉을 은근히 깎아내렸고, 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니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유잉은 많이 평가절하가 되었다. 비슷한 케이스가 조던의 쓸만한 사이드킥 대접받았던 스카티 피펜이었는데, 조던은 안티도 꽤 많은 선수이기 때문에 이들에 의해 오히려 과대평가를 받는 경우도 많아 과소평가와 과대평가를 동시에 받는 특이한 케이스가 된다.] 이어지는 2년차에 유잉은 카트라이트와 함께 트윈타워를 구축하고 주 포지션인 센터가 아닌 파워 포워드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포지션임에도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은 여전히 애틀랜틱 디비전의 최하위에 머무르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사실 이건 당시 닉스가 굉장히 불운이 심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된 빌 카트라이트는 84-85시즌에 부상으로 시즌아웃되고 유잉의 루키 시즌인 85-86시즌에는 단 두경기만 뛰었다. 버나드 킹은 84-85시즌 득점왕이었으나 다음 시즌 부상으로 한 경기도 못 뛰었고, 제럴드 그린은 그냥 롤플레이어였다. 킹은 유잉의 2년차이던 86-87시즌에도 불과 6경기밖에 못 뛰었고 카트라이트는 58경기를 뛰었으나 이미 하락세가 완연했다. 결국 유잉 외에 위력적인 선수가 없었던 것. 어느 덧 3년차 시즌에 접어든 유잉에게 팀은 새로운 파트너를 선사해주었다. 프로비덴스 대학의 코치를 맡고 있던 30대의 젊은 감독인 릭 피티노와 브루클린 출신의 포인트 가드 마크 잭슨이 바로 그들이었다. 특히 마크 잭슨은 약점이던 가드진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면서 신인왕까지 거머쥐었고, 유잉은 그와 함께 빌 카트라이트를 제치고 주전 센터로 도약하면서 팀을 이끌면서 결국 데뷔 3년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상대는 당시 [[래리 버드]]가 이끌었던 강팀인 [[보스턴 셀틱스]]였는데, 1승 3패로 1회전 탈락에 그치는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유잉은 첫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더 이상 풋내기 선수가 아님을 과시하였고, 다가오는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더하게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